글과 그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탄생 그리고 파괴와 복원의 역사

은 빛 바 다 2021. 1. 2. 10:43

안녕하세요. 은빛바다예요.

우와~ 벌써 2021년이 밝았습니다. 제가 작년 이맘때,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기대했던 작품이었던 만큼 사전조사를 하기도 했었고, 지금도 피에타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면 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피에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탄생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화가·건축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차로 약 두 시간 거리 떨어져 있는 카센티노 지역 출생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으며, 예술 작업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 그는 프랑스에서 로마 교황청으로 파견 나온 그로슬라에(jean villiers de la groslaye) 추기경에게 한 점의 작품을 의뢰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미술사 최고의 걸작인 피에타입니다. 이 피에타를 제작했을 당시,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겨우 만 24살이었습니다.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피에타는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피에타는 이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연민, 동정, 자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피에타는 그 사전적 의미를 넘어 '자비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주권에 영혼으로 복종한다'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한편 미술사에 피에타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피에타란 성모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합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수많은 예술가들이 만든 피에타 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공개되자 세간의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는데요. 찬사뿐만 아니라 무수한 비판도 쏟아졌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표현이 기존의 작품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지나치게 앳되게 표현된 점, 예수의 몸에 비해 마리아의 신체비율이 매우 거대하게 표현된 점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특이점은 이뿐만이 아닌데요. 먼저 다양한 피에타 작품들을 훑어본 후에 마저 이야기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전후의 여러 피에타 (13~15세기 )

 

 

 

미켈란젤로 피에타의 특징

 

성모마리아의 앳된 얼굴

① 성모마리아의 앳된 얼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면,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지나치게 앳되게 표현되었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죠. 저 또한 예수가 성인이 되었는데도, 마리아가 여전히 어린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정숙하고 순결한 여인은 영원히 늙지 않는다.'라는 주장을 과연 어느 누가 반박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인간은 '죄악'으로 인해 늙게 됩니다. 그러나 동정녀인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죠. 그렇기에 미켈란젤로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운 마리아를 앳된 얼굴로 표현한 것입니다. 

한편 기존의 피에타를 보면, 마리아가 예수를 바라보거나 뺨을 맞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또한 이전의 피에타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고통과 아들을 잃은 성모 마리아의 슬픔이 한껏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를 조금 더 고차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일체의 감정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난 상태에서 상황을 관조하고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리하여 미켈란젤로는 슬픔을 초월한 성모 마리아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차분한 표정이야말로 그 고통과 처절함을 더욱 극대화하는 듯합니다. 한편 이러한 초월적 면모야말로, '하나님의 주권에 영혼으로 복종한다'라는 피에타의 속 뜻을 잘 담아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의 크기 > 예수의 크기

② 전혀 맞지 않게 의도된 비례

피에타는 비례가 전혀 맞지 않는데요. 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실제보다 2배 가까이 크게 조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들과 어머니의 인체 비율이 맞지 않게 보이는 것도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피에타는 예수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 나와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데요. (위에 첨부한 사진 참고하세요.)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도, 옷을 이용하여 마리아의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하여, 그러한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앴습니다.

옷자락 주름은 작품의 입체감과 공간감을 한껏 살려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옷'은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갖습니다.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에 의해 보호받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미켈란젤로는 구겨진 옷자락 주름을 표현하여, 이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켜주고 계신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어깨 띠에 남겨진 미켈란젤로의 서명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남겨진 유일한 작품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품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서명이 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마리아가 두른 어깨띠에는 '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여러 설(說)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유명해졌음에도 사람들이 이것을 조각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자, 열이 받은 미켈란젤로가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는 당시에 경악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조각가가 조각에 자신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 마리아의 옷깃에 사인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켈란젤로의 이러한 기행은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돌아가는 길에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작품 어디에도 서명을 새기지 않으셨는데, 자신이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해져서 서명을 넣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피에타, 신()을 위한 작품

관객은 정면에서 피에타를 감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피에타를 정면이 아닌, 위에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요? 이 사진이 바로 피에타를 위에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거대한 예수의 몸이 특징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위에서 보았을 때에, 예수와 마리아의 인체 비례가 완벽하도록 조각했습니다.

모두가 정면에서 피에타를 바라볼 때, 천재 조각가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피에타가 인간이 아닌, 신(神)을 위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피에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피에타, 파괴와 복원의 역사

 

미켈란젤로는 일평생 신을 향한 진정한 헌신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미술사 최고의 걸작들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룸으로써 예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0세기에 피에타가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에타 테러 사건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태생의 호주 국적자인 지질학자 토트 라슬로(Toth Laszlo)가 공구로 피에타의 얼굴을 내리치는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토트는 '내가 바로 예수다. 우리 어머니는 저렇지 않다'라며 공구로 15번이나 피에타를 가격하여 손상시켰습니다. 그는 관리자와 관객들에 의해 현장 검거되었고, 범행 후 1년간의 재판 끝에 이탈리아 정신병원에서 2년의 강제수용 치료 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성모 마리아의 코가 날아가고 왼팔을 비롯한 몇몇 부위가 박살 나 버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피에타의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튀자, 구경꾼들이 조각들을 주워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회수한 부위는 파손된 전체 부위의 43%에 불과했고, 마리아의 코는 통째로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976년에서야 이탈리아 당국은 피에타를 복원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피에타는 두께 19mm, 높이 4.5m, 너비 4m, 무게 0.5톤의 방탄유리로 감싸지게 됩니다. 더불어 피에타가 관객과 상당히 먼 거리에 전시되어 있기 때문에, 관람하는 데에 불편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 정도는 이해해야겠지요. 현재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피에타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