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이 사랑한 여인 나타샤는 누구인가?

은 빛 바 다 2020. 12. 31. 18:57

안녕하세요. 은빛바다예요.

 

 

 

이렇게 눈이 푹푹내리면 겨울이되면, 백석의 시가 생각나네요.그건 아마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르기 때문일거에요.

 

백석은 시 뿐만 아니라, 그 수려한 외모로도 유명하죠.

그렇기에 백석이 북(北)으로 떠난 뒤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스스로 자신이 백석의 옛 애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죠.

그래서 오늘은 백석의 대표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으며, 백석이 사랑했던 여인 나타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본문부터는 편의상 경어체를 생략하겠습니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존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룸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없이.

 

 

 

나타샤

 

나타샤(Наташа)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함흥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던 백석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을 것이고, 러시아의 여러 문학작품에서 나타샤로 상징되는 수많은 여주인공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니 백석도 마음 속 누군가에게 나타샤라는 애칭을 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백석덕후의 대표주자 안도현은 백석의 나타샤로 특정인을 지목하고 있다. 안도현은 나타샤를 ‘자야’라는 여인으로 확신한다. 따라서 그는 ‘란’이나 ‘최정희’를 나타샤라고 칭하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단정짓고 있지만.. 아무렴 어때? 오늘날에도 그 출중한 미모와 매력으로 후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백석. 그의 ‘나타샤’가 누구였을 지 짐작해 보는 것은 재미난 일이다. 오늘날 나타샤로 거론되는 대표적 인물이 세명이 있다. 지금부터 살펴보자.

 

 

 


첫번째 나타샤 후보자, 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엔 란이가 진짜 나타샤이다. (내 뇌피셜로는 100퍼센트) 그녀의 본명은 박경련인데, 통상 ‘란’이라고 불린다. 그녀는 당시 이화여고에 다니던 신여성으로 고향은 경상남도 통영이다. 1935년,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 때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파티에서 박경련을 처음 만나고 첫눈에 반한다. 박경련은 백석의 신문사 동료 신현중 누나의 제자였다. 그리고 허준의 부인 신순영은 신현중의 여동생이었다. 백석은 란과 안면이 있는 신현중을 부추겨, 그와 함께 친구 허준의 통영 신혼여행을 따라간다. 그러나 백석은 통영까지 가서 란을 만나지 못하고, 그녀의 사촌오빠와 객줏집에서 식사만 하고 돌아온다. 당시 백석의 심정을 노래한 시 <통영> 시리즈 1,2,3 에는 란을 향한 그의 연정이 담겨있다.

 

 

백석, <편지> 중 일부 (조선일보 1936년 2월 21일자에 실림)

남쪽 바닷가 어떤 날근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하하엿습니다.

머리가 감아코 눈이 크고 코가 놉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엿습니다. 

그가 열 살이 못 되여 젊디젊은 그 아버지는 가슴을 알어 죽고 그는 아름다운 젊은 홀어머니와 둘이 동지섯달에도 눈이 오지 안는 따뜻한 이 날근 항구의 크나큰 기와집에서 그늘진 풀가티 살어왓습니다. 

백석은 란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왕래하던 시기에 자야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거고, 살림차리는 건 살림차리는거? ㅋㅋㅋ) 그러나 백석이 누구인가? 희대의 바람둥이 아닌가. 그는 자야를 만난 후에도 친구 허준과 함께 통영으로 가서, 란에게 청혼을 한다. 그러나 백석의 집안이 별 볼일 없단 이유로 거절당한다. 당시에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헛소문이라고 한다), 친구 신현중이 통영에다가 이 소문을 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신현중은 자신의 약혼녀와 파혼을 하고 란과의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이때 백석은 ‘여우에게 홀린 것 같다.’ 고 하며 못내 아쉬워했다. 이후, 그의 상실감을 담은 수필과 시들이 연이어 쓰여진다.

 

 

백석,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긋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것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란과 신현중이 결혼한 다음 해에, 백석도 집안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했다. 그리고선 곧장 서울 돌아와 자야와 다시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다시금 자야와 이별 한 뒤, 백석은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를 쓰게 된다. 여기서 다시금 그의 첫사랑 란을 그리워한다.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 백석의 ‘어여쁜 사람’이 란이가 아니고 누구일 수 있겠는가. 당시 만주에 살았던 백석에게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은 만주에서 아주 먼 바닷가, 바로 란이가 살던 통영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포옹 한 번 해보지 못한 여인.. 나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여인.. 친구에게 빼앗겨 버린 여인.. 그렇기에 더욱 ‘여우’ 같은 여인.. 한 남자의 리즈시절에, 이런 여자가 스쳐 지나갔다면, 그 여자가 분명 나타샤일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말해서 나타샤로 거론되는 여인들 중에서 란이가 예쁘기도 제일 예쁘다. ㅋㅋ

 


두번째 나타샤 후보자, 김영한

 

김영한. 기명은 김진향(眞香), 법명은 길상화(吉祥華). 백석이 붙여준 애칭 ‘자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영한이야말로 백석의 나타샤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에서는, 오직 백석과 자야만이 등장한다. 사람들이 김영한을 나타샤라고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석과 김영한의 러브스토리를 풀어보자. 

김영한의 집안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서 망해버렸다. 그래서 1932년, 김영한은 16세의 나이로 조선권번 기생이 된다. 그러나 공부에 뜻이 있었던 김영한은 조선어학회 회원 신윤국의 후원으로 1935년,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다. 그후 신윤국이 투옥되자, 김영한은 유학생활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간다. 그리고 함흥의 정재계인사들에게 신윤국을 만나게 해달하는 청을 하기 위해, 그들을 만날 수 있는 함흥권번에 들어간다. (시중의 서적들에서는 김영한이 왜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쉴드치는 구구절절 스토리가 너무 많다 ㅋㅋㅋ 이유가 어딨어. 먹고 살려고 하는거겠지. 아무튼 사람들은 왜 이렇게 김영한을 쉴드치는걸까?)

1936년, 백석이 통영을 다니면서 란에게 구애를 하던 그 시기, 백석은 김영한을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첫 시집 <사슴>을 발간한 이후 직장을 관두고 함경남도 함흥으로 떠났는데, 그 곳에서 영흥고보 영어교사로 일했다. 어느날은 백석이 학교 교사 송별회로 함흥관에 갔는데, 그곳에서 관기로 있던 김영한을 만났다. 백석은 김영한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당신은 내 마누라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기 전에 이별은 없다,’ 라고 말했다. 그 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김영한이 지니고 있던 이백의 시집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자야오가>란 한 밤에 들려오는 오나라의 노래라는 뜻인데, 여기서 자야만 따왔으니 그 뜻은 한 밤(one night)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에게 낮이 아닌 밤이라는 애칭을 붙여 줄 수 있을까? (낭만적이긴 한데, 무튼 나는 회의적임.)

어쨌든 둘이 서로를 사랑한 것은 맞다. 그래서 백석의 부모는 그 둘을 갈라 놓기 위해 서둘러 백석을 결혼시킨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결혼을 했다. 이를 알게 된 김영한은 고향인 한성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백석도 부인을 버리고, 학교도 그만두고, 김영한을 따라 한성으로 갔다. 그리고서는 ‘그래도 나는 색시 얼굴도 안 봤어! 당신 내 성질 잘 알잖아!’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나서도 2번이나 더 장가를 들었다!! 이거슨 사랑과 전쟁. (들리는 바로는, 백석의 부인들은 아이를 못가져서 시댁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백석이 다른 데에 살림을 차려놨는데 어느 세월에 아이를 갖는단 말인가? 조선의 성모 마리아냐???)

백석이 이렇게 결혼식만 치르고 김영한 곁에서 지내자, 김영한은 백석과 결혼한 여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배 위에서 자살을 하려고 결심했으나, 그러지 못한 채 돌아왔다. 김영한이 돌아온 날 밤, 백석은 그녀에게 함께 만주로 떠나 살자고 제안했다. ‘나에게는 정말 피치 못할 딱한 사정이 있소. 당신은 죄없이 쫓겨 다니는 고생 속에 있고, 나 또한 집에 들어가서 편안히 등을 붙일 단 한 칸의 방이 이 땅에는 없어요!’ 그러나 김영한은 백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숨어 지내게 된다. 

그렇게 경성 청진동에서 숨어지내던 자야에게, 어느날 백석으로부터 날아온 쪽지가 배달된다. 백석이 김영한의 집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몇 달만에 만난 둘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다음 날 백석은 직장때문에 다시 함흥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을 떠나기 전 백석은 자야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건낸다. 거기에 담긴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그리고 1939년,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난다. 사실 백석은 김영한과 아주 헤어진 것 처럼 보여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다시 김영한의 곁으로 돌아와 함께 살겠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석은 만주로 떠난 뒤에도, 김영한에게 직접 지은 한복같은 것을 선물로 보내기도 했었다. 해방 후 백석은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는 데, 그 뒤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둘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백석과 헤어진 뒤, 김영한은 어떻게 살았을까? 김영한은 해방된 뒤에 대한민국 고위층의 첩으로도 지냈다. 그 고위인사는 6.25 전쟁통에 피난을 떠나면서, 김영한에게 땅문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김영한은 그 땅에다 대원각을 세웠다. 김영한의 물장사는 초대박이 났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아이 둘을 낳았다.

그리고 송준(1962~)이라는 백석 연구자가 있는데, 송준은 백석 평전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출간한 전력이 있다. 그가 백석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 김영한을 찾았는데, 김영한은 백석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송준에게 백석에 대한 정보를 물어 볼 정도. 결국 송준에게서 그리고 여기저기에서 캐낸 정보로,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89)>, <내 사랑 백석 (1989)>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정재계를 주무르는 성공한 사업가 김영한은 반세기 로맨스의 여주인공으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1997년, 창작과 비평사는 백석문학상을 제정했는데, 이 상은 김영한이 창비에 기증한 2억원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김영한은 당시 시가 1000억원에 달하던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그 자리가 길상사로 탈바꿈되었다. 이 때 김영한은 ‘천억에 달하는 돈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 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9년, 김영한은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유골은 길상사 언덕에 뿌려졌다. 지금도 길상사에는 김영한을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으며, 극락전에서는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70이 넘은 나이에 책을 출간하여, 스스로 백석의 뮤즈가 된 그녀.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나타샤로 각인되어 있다. 김영한이 나타샤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의 화류계의 대모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이를 증명하는 엄청난 자본력이 뒷받침 되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사람을 매혹시키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그러나 남자라면 알 것이다.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옆구르기 하면서 보나, 거꾸로 뒤집어 봐도 백석의 나타샤(첫사랑, 진정한사랑)는 란이라는 것을. 

 

 


세번째 나타샤 후보자, 최정희

 

당시 노천명, 모윤숙, 최정희 3인방이 백석과 친하게 지냈는데, 이들은 백석을 ‘사슴’, ‘사슴군’이라 불렀다. 최정희가 세번째 나타샤로 등장한 이유는 그녀의 딸 덕분이다. 최정희의 딸, 소설가 김채원이 2001년 <문학사상> 9월호에, 백석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세상에 공개했다.

 


그리고 나타샤가 되지 못해 슬픈 여인, 노천명

 

노천명,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 뿐만이 아니라 당시 많은 여성작가들이 백석을 흠모했었다. 노천명의 <사슴>이 백석을 향한 연모의 시가 아니냐는 추측들이 있는데, 이는 충분히 설득력있는 추측이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백석의 별명이 ‘사슴’이었기 때문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과 백석은 꽤나 닮아 보인다.

 

이렇게 백석의 시 몇 편과 함께, 백석의 나타샤로 거론되는 여인들에 대해 알아보았다. 여러분은 백석이 사랑했던 진짜 나타샤가 과연 누구라고 생각하는가?혹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나타샤와 같은 누군가가 자리잡고 있진 않은가?

 

눈이 푹푹 나리는 이 겨울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나타샤를 떠올려보기에 적절하다.